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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_왕건, 궁예, 견훤
후삼국 시대 주인공들
통일신라 말기에는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신라의 수도 경주는 통일신라의 중심에 있지 않고 너무 한쪽에 치우쳐 있다 보니 타지방의 관리가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적 지리적 배경으로 새로운 삼국시대가 열렸는데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후 고구려를 세운 궁예 그리고 통일 신라시대의 신라 그렇게 3개의 나라를 후삼국이라고 한다.
이러한 후삼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왕건이 통일을 하고 새로운 국호 고려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태조 왕건이지만 후삼국이 시작할 때 왕건은 궁예의 부하였다.
후삼국시대를 개척한 궁예와 견훤은 모두 후발주자인 왕건에게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넘겨주었다. 후삼국 시대가 형성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통일신라의 분열과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통일신라는 혜공왕부터 진성여왕 시대까지 약 100년간 20번도 넘는 정변에 의해 왕이 살해되거나 바뀌었고 이러한 치열한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되었다.
신라의 통치력 상실은 지방세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견훤이 제일 먼저 백제를 부흥시킨다는 슬로건으로 후백제를 건국하고 이어서 궁예가 후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견훤이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스스로 나라를 세웠지만 또한 그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아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의 역사에도 이러한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견훤은 지금의 광주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전주에 도읍을 정한 다음 백제의 부활을 선포하고 나라를 건국했다. 견훤의 라이벌은 후 고구려의 궁예가 아니고 왕건이었다.
견훤은 지금의 상주 지역 농부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라에서 무인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했지만 신라에 반기를 들어서 지금의 광주 일대를 점령했다.
경주의 수도 서라벌을 습격해서 성공하여 거의 신라를 멸망 시킬번 했지만 왕건이 신라를 도와 실패한다. 공산성 전투에서는 왕건을 궤멸시켰다.
하지만 말년에 아들 신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서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장남에게 배반을 당하고 신검에 의해서 다른 자식들이 죽음을 당하자 결국 왕건에게 투항한다.
왕건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해서 후백제가 멸망하도록 한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공격해서 멸망시킨 것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다음날 사망한다.
궁예는 신라의 진골 출신이다. 하지만 태어나서 예언가가 나라를 망칠 인물이라고 예언을 해서 죽음을 당할 처지에 있었으나 탈출을 하여 승려로 살았었다.
탈출 과정에서 한쪽 눈을 실명을 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궁예의 애꾸눈 캐릭터가 생긴 것이다. 궁예는 후 고구려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된다.
궁예는 왕건을 부하로 둘 정도로 세력이 강했지만 스스로를 미륵보살이라고 칭하면서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해서 민심을 잃게 된다.
우리가 드라마 같은 데서 많이 보는 "관심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행동이 궁예를 몰락시켰다.
말년에는 자신의 부인과 아들들을 모두 죽이는 행동을 하고 왕건을 반역자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나고 왕건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왕건은 후삼국시대의 최종 승리자이다. 시작은 후 고구려 궁예의 부하였지만 신라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해서 고려라는 나라를 세운다.
왕건은 후삼국 주인공 가운데 출신성분과 성장과정이 가장 부유하고 안정적이었다. 지금의 개성의 세도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도선이라는 스님이 이 집에서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왕건의 가문은 무역업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예성강과 강화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왕건이 궁예의 부하가 될 때 이미 어느 정도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다음이었다.
궁예를 죽이고 후 고구려 왕으로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왕건은 무력을 동원하는 것 이외에 지역의 호적들과 혼인 정책을 써서 우호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혼인 정책으로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거기에서 34명이 자식이 생겼다. 이러한 혼인 정책은 고려 건국 이후 극심한 혼란을 야기시켰다.
왕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외가 세력을 등에 업고 왕권을 노리게 되었다. 고려 제6대 성종이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결혼 정책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우고 25년간 통치를 했고 이후 고려는 34대 공민왕까지 무려 474년간 존속되었다. 왕건 후손에게 남긴 훈요 10조는 이후 고려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